1994년 여름, VF125를 막 구입하여 신나게 타고 다니던 시절이다.
아마 대부분 그렇겠지만, 입문 후 2~3개월쯤 지나면 어느 정도 실력도 붙고
무엇보다 간땡이가 붙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그때가 가장 위험한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간이 어느 정도 부어 있던 나는 일본어 학원을 가기 위해
양재동 법원 사거리에서 VF를 타고 신호 대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옆에 나란히 서 있던 한 대의 바이크.
알천백.
신호가 바뀌자마자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그 알천백을 보고
나는 허탈함과 동시에 강렬한 소유욕을 느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6년이 지난 2000년,
나는 결국 그 고삐를 쥐게 된다.
알천백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자

초크를 열고 시동을 걸면 우렁찬 배기음과 함께
알천백은 어렵지 않게 깨어난다.
엔진음은 가와사키보다는 조용하지만
혼다 특유의 정숙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가와사키처럼 금속이 부딪히는 듯한
메카니컬 노이즈는 거의 없다.
사이드를 올리고 바이크를 일으켜 세우면
바로 묵직한 중량이 체감된다.
건조중량은 220kg이 넘는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는 이전에 타보았던 세븐알보다 약 20kg 정도 더 무거운 수치였다.
엔진과 기어비
저속 토크는 충분하다.
출발 시 빌빌거리던 FZR1000이나 세븐알에 비해
클러치 미트하다가 시동 꺼뜨릴 일은 거의 없다.
미션은 5단까지인데
1단은 조금 짧은 느낌이다.
이 말은 1단 기어에서 속도가 많이 붙지 않는다는 뜻인데,
아마 스포츠 투어러의 목적상 언덕 출발이나 탠덤을 고려하여
토크 위주의 기어비로 세팅된 것 같다.
대신 알천백은 2단부터 흉폭한 이빨을 드러낸다.
미친 황소가 울부짖는 듯한 배기음을 내며
뒤에서 거대한 힘이 밀어주는 듯한,
조금은 공포스러운 가속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느낌은 3단, 4단에서도 동일하다.
고속 안정성과 브레이크
순정 스티어링 댐퍼가 기본 장착되어 있어
고속 영역에서의 안정감은 상당히 좋은 편이다.
순정 윈드스크린의 방풍 성능도 꽤 좋아서
약간 숙이고 타면 헬멧 위로 바람이 넘어간다.
브레이크는 토키코 6포트 더블 캘리퍼를 채용했지만
스즈키답게 반응은 약간 무딘 편이다.
소위 말하는 “땅에 꽂히는 느낌” 은 아니고
약간 밀리는 듯한 느낌이 있지만
그 때문에 위험했던 적은 없었다.
당시도 그렇고 이후 타 본 스즈키 바이크들도
제동 필링만큼은 항상 비슷한 느낌이었다.
조금 무르다 싶은 느낌.
하지만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브레이크 레버를 꽉 잡으면 된다.
악력기 쥐듯이 힘을 주어 꽉 잡으면
꽂히는 느낌 비슷하게 나온다.
아마 이것도 스즈키 브레이크 시스템 특유의 성향인지
후대 모델들에서도 비슷한 느낌이 이어진다.
라이딩 포지션과 프레임
라이딩 포지션은 F차와 R차의 중간 정도로
적당히 숙이는 자세가 나온다.
발 착지성도 좋은 편이다.
컨셉답게 직진 안정성은 매우 좋지만
알천백 오너들이 흔히 말하던 ‘ㄱ자 프레임’ 이야기는
솔직히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알천백의 무게와 출력을 버티기에는
프레임 강성이 조금 부족한 느낌이 있었다.
가속력이나 브레이킹에 비해
프레임 강성을 어떻게 느끼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건 더 강성이 좋은 프레임의 바이크를 타 보면
웬만큼 둔한 사람도 바로 느낄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프레임 이야기할 때
따로 한번 해보도록 하겠다.
왜 GSX-R1100만 ‘알천백’이라 불렸을까
이제 많은 4기통 1100cc 바이크 중에서
왜 스즈키 GSX-R1100만 ‘알천백’ 이라 불렸는지 이야기해 보자.
88올림픽 이후 일본 바이크들이
서울 퇴계로 등을 통해 수입되기 시작하던 시절,
당시에는 지금처럼 정식 수입사나 대리점이 있는 시대가 아니라
업자들이 개별 수입을 하던 시대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잘 팔릴 만한 기종들만 선별해서 수입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당시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바이크 종류는
지금과 비교하면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GSX-R1100은
당시 수입되던 바이크 중 최강의 성능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고,
라이벌이었던 가와사키 ZZR1100이
실제 최고속 성능에서는 조금 더 앞섰지만,
90년대 초중반 라이더들 사이에서는
“최강의 바이크 = GSX-R1100” 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인터넷 커뮤니티도 거의 없던 시절,
라이더들 사이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던
소위 말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 덕분에
1100급 바이크 중에서
GSX-R1100만 유일하게 ‘알천백’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무게에 비해 운동성은 꽤 좋은 편이었지만
후대의 알차들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도 당시 라이벌이었던
ZZR1100이나 CBR1100XX에 비해서는
와인딩에서 더 빠르게 코너링을 즐길 수 있었다.
꽤 오랜 기간 애마로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맨날 혼자 타던 예전과 달리
알천백을 탈 때는 알천백 카페 회원들과 투어도 많이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이 참 재미있었다.
그리고 지금
2026년 현재까지 살아남은 알천백은 이제 몇 대 남지 않았다.
오너들 역시 대부분 평생 소장 모드라
매물 자체가 거의 없다.
세월이 흐르면서
빠른 바이크, 좋은 바이크는 계속 나오지만
이상하게도
기억 속에 남는 바이크는 따로 있는 것 같다.
내게 GSX-R1100W,
알천백은 그런 바이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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